여러분, 다층세라믹캐패시터(MLCC)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우리나라에서는 삼성전기라는 회사가 MLCC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IT 분야 투자나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참 익숙한 부품일 겁니다.
MLCC는 흔히 '전자산업의 쌀' '전자 부품의 댐' 등으로 소개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MLCC가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지, 왜 많은 역할 중에 '댐' 역할을 하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시지 않으셨나요.
◇MLCC의 미션: 흐르는 전기를 붙잡아라
스마트폰 속에는 약 1000개 MLCC가 있습니다. 이 MLCC 안에는 수백 겹 쌓인 내부전극, 유전체가 전기 입자를 끌어당길(유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제공=삼성전기
먼저 MLCC라는 용어를 보따리 풀듯 하나하나 벗겨내 봅시다. MLCC는 '다(多·Multi)+층(Layer)+세라믹(Ceramic)+커패시터(Capacitor)'. 즉 '세라믹으로 만든 커패시터를 많은 층수로 쌓아올린 장치'인데요.
생소한 용어들이 많죠? 한걸음 더 들어가보겠습니다. 우선 커패시터의 의미부터 알아볼까요? 이전 반도체 연재 기사에서도 커패시터의 개념은 참 많이 다뤄졌는데요. 커패시터는 한글로 '축전지(蓄電池)'라는 뜻입니다. 말그대로 전기(電)를 모을 수 있는(蓄) 장치라는 거죠.
세라믹은 평소 여러분들이 도자기 그릇 구매하시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끈적한 진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고온으로 구워내 단단해진 것이 바로 세라믹 그릇이잖아요. MLCC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전기를 모아둘 수 있는 다양한 흙가루들을 걸죽한 액체(슬러리) 상태로 만든 뒤, 이걸 여러 층 얇게 펴 발라 구워낸 게 MLCC라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양한 성질의 흙가루가 들어간 반죽(슬러리)을→ 평평하게 여러 겹으로 쌓아서→고온에서 구워낸 뒤 칩 크기로 잘라낸→전기를 모아둘 수 있는 장치.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MLCC의 전기 저장 능력(정전용량)을 나타낼 때 단위는 '패럿(F)'을 씁니다. 패럿이 높을수록 전기를 많이 잡아두는 MLCC입니다.
그럼 왜 MLCC는 전자기기 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품일까. 크게 두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하나는 정류(전류를 정리하는) 기능입니다. 기기 내에서 전기의 흐름이 부드러울 수 있도록 돕는다는 얘기인데요. 스마트폰을 예로 들어볼까요? 스마트폰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똑똑한 대신 예민하고 까다로운 녀석입니다. 데이터 연산을 위한 전류 값이 애초 약속했던 것보다 적거나 많으면 바로 오작동을 일으킵니다.
이때 필요한 부품이 MLCC입니다. 전압을 가하는 장치와 AP 사이에 MLCC가 위치해 약속했던 전류값이 흐를 수 있도록 전기를 붙잡아둔 뒤, 일정한 값으로 AP 까지 도달시키는 역할을 하죠. '댐'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두번째 기능. 불필요한 간섭현상(노이즈)를 바깥으로 날려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스마트폰의 인생은 '실전'입니다. 아무리 이론상으로 완벽한 모바일 통신 기기를 만들었더라도, 전화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할 때 스마트폰이 받는 통신 주파수(RF)는 예측할 수 없고 거칠죠. 주파수를 관장하는 통신 칩과 AP 사이에 위치해 각종 간섭현상을 잡아낸 뒤 기기 바깥으로 날려버리는 역할을 이 MLCC가 합니다.
정리하면 큰 흐름에서 MLCC는 전자 기기 곳곳에서 안정적인 전기 공급을 위해 위치합니다. 스마트폰 속 수많은 회로에 900~1100개 MLCC가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5G 시대 개화, 스마트폰 기능 고도화로 더욱 많은 MLCC가 필요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MLCC의 전류 저장 능력(정전용량)을 나타낼 때 단위는 '패럿'을 씁니다. 패럿이 높을수록 전기를 잘 잡아두는 MLCC라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MLCC의 조건
그럼 이제 MLCC의 구조와 원리를 조금 더 자세히 뜯어봅시다. '웰메이드' MLCC의 조건은 무엇일까. 분석을 위해 크게 MLCC의 필수 소재와 구조를 나눠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MLCC의 중간을 칼로 자르면 케이크의 단면 같습니다. 흘러가는 전기를 붙잡도록 하는 커패시터 층이 있고, 전기가 들어오는 (+), (-)내부전극 층이 교대로 쌓여있는 모습인데요. 각 층의 두께는 마이크로미터(㎛·1억분의 1m) 단위로 상당히 미세합니다.
우리는 MLCC에서 '커패시터'층의 구성 요소를 특히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MLCC가 주된 역할을 하는 핵심 층이니까요. 커패시터의 핵심 키워드는 '유전체'입니다. 유인할 유(誘), 전기 전(電). 즉 MLCC 내부 전극으로 흘러들어온 전기 입자들을 끌어당겨 못 움직이게 하는 물질을 말하는데요. 그럼 커패시터는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길래 빠르게 흐르는 전기를 붙잡을 수 있을까.
MLCC 속 유전체 역할을 하는 세라믹 소재는 타이타늄산바륨(BaTiO₃)입니다. 이 소재가 쓰이기 전에는 '타이타늄산칼슘지르코늄(CaZrTiO₃)'이라는 소재가 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재보다 약 20배 높은 유전율을 가진 BaTiO₃가 1970년대 경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MLCC 소재 개발 엔지니어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소재입니다.
BaTiO₃가 유전율이 좋은 이유는 다른 물질들보다 '분극(分極)'을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BaTiO₃는 기본적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입니다. 하지만 MLCC 외부에서 전압을 걸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BaTiO₃ 속 전기 성질을 띤 (+), (-) 알갱이(이온) 간 결속이 약해져서 극단으로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요. 이게 분극입니다.
분극이 크고 쉽게 일어날수록 유전율이 큽니다. 커패시터 상단과 하단에 위치한 내부전극 층으로 들어온 각각의 (-), (+) 입자들을 더 많이 끌어당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위 그림을 참고해주세요.
스마트 기기가 성능 고도화로 높은 전류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전기 알갱이를 되도록 많이 끌어당겼다가 일정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고용량' 유전체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금도 엔지니어들은 분극과 유전율이 확실한 BaTiO₃의 고유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유전율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고안 중입니다.
커패시터 구조 개선을 위한 작업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커패시터 성능이 개선되는 조건을 봅시다. △커패시터의 두께가 얇을수록 좋고 △커패시터 면적이 넓을수록 좋고 △커패시터를 되도록이면 많이 켜켜이 쌓아둘수록 전기 입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은 끈적한 상태의 세라믹을 최대한 얇게 펴발라서, 최대한 많은 층을 쌓아 올리려고 노력합니다. 이게 MLCC 업체들의 기술 경쟁력이죠.
미세한 세라믹 분말을 균일하고 일정한 크기로 만드는 것도 기술입니다. 세라믹 알갱이들 사이 결함이 생겨 오작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교한 혼합물(슬러리)을 만드는 작업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내부 전극을 잘 만드는 것도 기술입니다. 전극은 니켈 분말을 곱게 펴 발라 만드는데요. 만약 니켈 분말이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면, 커패시터를 뚫고 다른 층의 내부전극과 연결이 되면서 전기 입자를 끌어당길 수 없는 오작동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구조임에도 분말의 성질을 세밀하게 다뤄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 필요합니다.
◇전장용 MLCC가 뜬다…용량·안정성 모두 잡아야
요즘 MLCC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산업군은 자동차 분야입니다. 자동차가 전자제품처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현재 자동차에는 5000개가량 MLCC가 쓰이지만, 미래에는 1만2000개 이상 MLCC가 탑재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만큼 이 분야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크게 운전자 안전을 위한 △자율주행(ADAS) 시스템 △인포테인먼트 △샤시/바디 △배터리 관리(파워트레인) 분야에서 MLCC의 쓰임새가 주목 받는다고 하네요.
그럼 기술적 관점으로 들어가봅시다. 자동차 MLCC는 어떤 기술이 중요할까. 우리가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핵심 키워드는 바로 '온도 변화'입니다. 자동차는 IT 기기에 비해 극한의 환경을 마주할 확률이 상당히 큽니다. 극단적 예로 전기차가 사막을 달리다 보면 예측하지 못한 높은 열이 차량 내에서 발생할 수 있고요. 남극을 달리면 극한의 추위를 견디며 달려야 하죠.
MLCC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업계에서 전장용 MLCC 연구에 가장 집중하는 분야는 '상 변태(Phase Transformation)'입니다. 스마트폰에서는 발생하지 않던 고온의 열이 자동차에서 발생하면 유전체 세라믹의 결정 구조가 완전히 바뀌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애초 제품을 만들 때 약속했던 세라믹의 유전율이 갑자기 변화하면서 전류 흐름까지 완전히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량 내 반도체는 오작동을 일으키고, 운전자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삼성전기 등 MLCC 회사에서 '고신뢰성' 제품을 만든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업계에서는 BaTiO₃에 '마법의 가루'를 넣으면서 온도 변화에도 영향을 덜 받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이 마법 가루의 정체는 바로 '희토류'입니다. 희토류를 얼만큼 넣느냐에 따라 신뢰성이 결정되기 때문에 각 MLCC 회사들은 이 레시피를 철저히 영업 비밀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알맞은 희토류 종류·최적의 비율을 찾기 위한 수천·수만번의 실험이 각 회사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만 알려집니다.
자동차 MLCC 분야에서 또 살펴봐야 하는 것이 정격전압입니다. MLCC 한개 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전압을 '정격전압'이라고 하는데요.
스마트폰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정격 전압이 적용된 MLCC가 쓰입니다. 한 개 배터리를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전압 환경을 조성할 수 있어서입니다.
반면 자동차용 MLCC는 정격전압이 높아야 합니다. 배터리는 물론 각종 전압을 가하는 장치들이 복잡하게 설치돼 전압 변동 폭이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락가락하는' 변동폭을 품어줄 대인배스러운 고용량 MLCC가 필요합니다.
결국 세라믹의 용량을 높이려면 물리 법칙에 따라 각 층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안정성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마주하는 혹한의 환경을 따졌을 때, 유전체의 내구성을 고려하면 한없이 얇게 만들지는 못하는 한계점에 봉착하는 거죠. 얇은 비닐일 수록 미세한 열로도 쉽게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자동차에는 기존 모바일 기기용 MLCC보다 다소 낮은 정전 용량을 가진 MLCC를 여러 개 연결해서 전류를 관리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자동차 안에 MLCC가 더 많이 필요해진다는 얘기니까 MLCC 업계에는 긍정적인 신호겠죠.
*TIP: IT 기기에는 정전용량이 마이크로패럿(uF) 단위 MLCC가 대세지만, 차량에서는 한 단계 작은 단위인 나노패럿(nF) MLCC가 주로 쓰입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용량의 MLCC가 쓰인다는 얘기겠죠. (1000nF=1uF)
◇"실례지만…으데 전장 MLCC입니꺼?" "90%가 일본 MLCC입니다"
MLCC 분야 최강자는 일본입니다. 일본의 무라타라는 회사가 MLCC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데요. 업계에 따르면 무라타는 MLCC의 사이즈, 정격전압, 정전용량에 따라 다른 2000가지 이상의 상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MLCC를 원하는 고객사들이 원하는 대로 상품을 준비해줄 수 있다는 말로도 요약됩니다.
세계 2위 삼성전기도 MLCC 호황에 힘입어 무라타를 쫓아 빠르게 추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장용 MLCC 분야에서 다양한 기술을 축적해야 한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무라타 외 TDK, 타이요유덴 등 일본 기업의 이 분야 시장 점유율은 90%를 넘는다고 하죠. 삼성전기가 중국 천진 공장 등에서 차세대 MLCC 생산 역량을 차차 확보하고 있다고 하니 시장 경쟁력이 얼마나 빨리 늘릴 수 있을 지가 업계 관전 포인트입니다. 최근 150℃에서도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고신뢰성 차량용 MLCC도 출시했다는 발표가 있었네요.
MLCC 제조 외 MLCC 원재료 기술 개발도 일본이 잘합니다. 한 예로 우리나라 MLCC 업체들은 내부전극을 만들 때 쓰는 고운 니켈 가루 대다수를 일본에서 들여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MLCC의 신뢰성을 높이는 모래 가루를 만드는 노하우는 일본이 단연 선두입니다. 이 재료들을 국산화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논의돼야 한다는 게 업계 중론입니다.
다행히 2019년 일본 수출규제 이후 MLCC에 대한 국내 연구도 상당히 활발해졌다고 하죠. 삼성전기라는 큰 기업이 잘하고만 있을 줄 알았던 분야를 자세히 살펴보니 MLCC가 일본 전략용 물자에도 포함이 돼 있는데다 필수 소재 의존도까지 상당히 높다는 걸 인지하게 된 이후로요.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등 연구소와 고려대·경상대 등 학계, 삼화콘덴서, 아모텍, 창성 등 민간 기업의 연구가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KETI 오철민 박사팀은 전장용 MLCC를 여러 개 연결해도 각종 차량 내 진동에 잘 견디는 모듈을 개발해 의미 있는 토종 연구 성과를 냈습니다.
공급망과 기술 패권이 이슈로 떠오르는 요즘. 산업의 쌀로서 중요도가 더욱 높아지는 MLCC 기술 연구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한국에서도 활발하길 바라며 기사 마무리합니다. 따뜻한 봄 보내세요.
출처: 서울경제
뜨리스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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